충의공 최경회장군의 추모제를 모시고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이하여 2011년 10월 11일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백용리 422번지 충의사에서는 충의공 최경회장군의 추모제를 화순, 나주 국회의원 최인기 농수산부 분과윈원장과 화순군 홍이식군수님과 기관장과 그리고 지방 유도회 관장님 및 유지분과 범최씨 대종연합회에서 경주최씨, 전주최씨, 탐진최씨, 낭주최씨, 초계최씨, 통천최씨, 수성최씨 종회 회장님과 종친분과 해주최씨 문중에서 대종회 회장님과 보성, 강진, 영암, 나주, 담양, 광주 종회장님 종친님과 전라북도 장수 논개 선양회 안병훈 회장님, 전 함양군수님이신 최낙근군수님 등 전국 각지에서 충의공 최경회장군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분 약6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충의사 건립 당시부터 노력을 많이 하신 남하토건(주) 최상옥회장님이 참석하여 감회가 새로웠고 특히 최인기 국회의원님께서는 지사님과 장관으로 재임 시 음으로 양으로 많은 노력을 하신 분으로 추모제때 초헌관으로 모시게 되었다. 향사 행사 중 진주 검무단의 검무춤은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위로하였으면 후손들이 수많은 세월이 자났으면서도 추모제를 모시지 못한 속죄의 뜻으로 용서를 빌었다. 최경회 장군은 1532년 11월 22일 화순의 삼천리 상삼마을에서 태어나 송천 양응전선생과 고봉 기대승선생에게 수업하고 1561년에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한 후 1567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습니다.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형조좌랑을 거쳐 여러 고을의 현감과 부사를 지냈으며 무술에 능하고 활쏘기 솜씨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병서를 탐독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왜적침입을 감지하고 대비를 하였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전라우의 병장이 되어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의병을 이끌고 싸움터에 나가 수많은 왜적을 물리쳤으며, 특히 무주전투에서 왜장을 활로 쏘아 죽이고 청산백운도와 언월도 등 국보급의 전리품을 노획했습니다. 또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의 지원요청으로 대첩을 거둔 전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습니다. 1593년 6월의 제2차진주성전투에 현지사령관으로 참전하여 5-6천의 적은 군사로 10만이 넘는 왜적과 밤낮 9주야에 걸쳐 혈전을 다하였으나 수적으로 너무 열세이고 외부지원이 없는데다 6월장마로 성벽이 도처에서 무너지니 개미떼처럼 처 들어오는 왜적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에 성의 함락이 다가오자 장군께서는 김천일, 고종후 등과 함께 촉석루에 올라 서사시 일절을 남기고 북쪽을 행해 사배한 후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습니다. 만일 이 전투에서 외부지원만 있었다면 왜적을 섬멸함으로서 임진7년 전쟁을 종식시켰을 것입니다. 원통한 것은 진주성의 혈전을 강 건너 불 보듯 구경만하고 도와주지 않는 관·의병과 명나라 군사들이었습니다. 논개부인은 장군의 부인으로 여성을 동원 왜적과 싸웠으나 마침내 성이 무너지고 부군이 순절하자 남편과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기생으로 유인하여 왜적의 승전연에 참석하고 적장 모곡촌육조를 의암으로 유인하여 떠밀어 왜장을 수장시킴과 동시에 순국하니 꽃다운 나이 20이었습니다. 호남방어를 위하여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하신 장군 부부의 충절은 우리 역사와 함께 길이 빛날 것입니다. 이 날 추모제 행사로 인하여 임란때 의병장으로 출병하시면서 사용하였던 ""골“(骨)자 즉 송골매기가 충의사에 게양되어 나부끼게 되었다. 2011.10.21 광주·전남도종회 최남용